창39장 1-6 절 "하나님의 동행" / 19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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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먼 이국땅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갔지만,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형통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여호와의 함께하심으로 형통하게 되지만,이 형통은 문제가 없다는 점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도 결말을 좋게 하신다는 점에서 좋은 것이었다.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가정 총무에 자리에 오르지만, 곧이어 거부하기 어려운 보디발 아내의 끈질긴 유혹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한 유혹을 이겨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자에게 주시는 형통함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창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보디발이 요셉을 사다(1절)
이집트에 끌려간 요셉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린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종’의 신분으로 지내게 된 다(17,19절). 구약성경에 서술된 최초의 이집트 ‘노예’인 셈이다. 이것은 요셉 이야기가 장차 있게 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이야기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창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호와께서 요셉과함께하시다(2-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 강조된다. 여호와의 함께하심은 요셉이 이방 땅에 거주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요소다. 여호와의 함께하심에 대한 언급은 우선 이삭에게 주신 약속에서 최초로 나타나지만(창 26:3), 야곱 이야기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특별히 야곱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갈 때 벧엘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하며 그를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창 28:15; 참 조. 31:3).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결과는 요셉 개인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5절 함께 읽겠습니다.
창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5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그가 거주하고 있는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는다. 장차는 이집트의 궁정과 온 땅으로까지 확대된다. 이것은 아브라함 에게 약속하신 이방인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복 주심 을 그대로 보여준다. 복 주심은 상태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복을 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이 복이 임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복주심의 상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가정이, 직장이, 삶의 지경에서 복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붙잡을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노예로 팔려가며, 종의 신분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형통하게 하십니다. 요셉의 형통함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이삭과 야곱의 약속이 성도님들의 자녀들과 가정에 계승되기를 소망합니다.
좀 더 들어가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은 오직 나 자신의 확신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개인을 통하여 주변에도 그리스도의 향기로 흘러갑니다. 3절 다시 읽어 볼까요?
창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그의 주인 보디발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가족이 교회공동체에서 그 모습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아니 확대해서 교회 밖(직장, 모든 걸음)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아쉬운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걸어야 하는 걸음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분이셨습니다.
눅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도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사회적으로)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행24: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바울도 그의 죽음앞에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사회적으로) 거리낌이 없도록 힘썼다라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개인의 형통함 뿐 아니라 주변에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져 가시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교회 안과 밖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것이 성경이 말하는 형통한 자의 삶인 줄 믿습니다.
나의 형통함이 나로 그치는 것이 아닌 나를 통하여 공동체에 그 사랑을 나누는 것 이 모습이 성경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합니다. 망하는 자에게 망하도록 두는 것이 아닌, 죄인들을 구원하려 오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 깨어진 사회를 향하여 우리는 형통함의 통로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족한 자녀들을 위하여 사랑의 도구로 쓰임받아야 합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노예의 자리입니다. 종의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통하여 그 주인의 집을 복되게 하십니다. 그를 통하여 애굽의 위기를 넘어가게 하십니다. 버림받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십니다. 결코 높은 자리가 요셉의 형통함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사람을 살립니다. 나라를 구원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되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그 한 사람이 내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 한사람이 바로 이 나라와 민족을 인도하게 하옵소서. 라고 한국교회와 나라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는 이 새벽이 되길 소망합니다.